[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7)
- 작성자
- 이규환 (이진표 부)
- 2013-01-29 00:00:00
[7] 미국서 성공 조국·교포사회에 헌신 박형만·윤병인씨
자산 1억달러 임대업 박형만씨 - 독일서 번돈 한국 송금후 美로
청소·공장근무 악착같이 모아 고향에 기부 복지재단도 추진
매출 1800만불 기업 윤병인씨 - 한국서 사기 돈 날리고 美로
청소업체 운영 멋지게 재기… 한인 소상인단체 만들어 도움
"독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조국과 미국 내 한인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 출신 사업가 박형만(74)씨와 윤병인(73)씨는 지난 10일 LA 주재 총영사관에서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6일 LA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해외 진출이 드물던 1960년대에 남들보다 먼저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봉사할 기회도 먼저 얻게 됐을 뿐"이라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한다"고 말했다.
◇막장 정신으로 성공… "재산 절반 사회 환원"
박형만씨는 충남 공주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2년 만에 중퇴한 뒤 서울 은평구의 한 공장에 미화원으로 취직한 그는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다 27세이던 1964년 7월 파독 광부가 되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씨는 "5개월 뒤 독일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고생한다고 말한 연설을 들었다"며 "그날 많이 울면서 정말 잘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힘든 광산 일을 마치고 오후 3시에 다시 인근 축사로 출근해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계약된 3년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2만4000마르크를 모았다. 서울에서 아파트 3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걸 당시 남편을 잃고 고생하던 누나에게 대부분 보냈습니다.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미국 LA로 건너갔습니다. 막장일을 하고 나니 어딜 가도 겁날 게 없었습니다."
자산 1억달러 임대업 박형만씨 - 독일서 번돈 한국 송금후 美로
청소·공장근무 악착같이 모아 고향에 기부 복지재단도 추진
매출 1800만불 기업 윤병인씨 - 한국서 사기 돈 날리고 美로
청소업체 운영 멋지게 재기… 한인 소상인단체 만들어 도움
"독일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떠날 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조국과 미국 내 한인 사회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파독 광부 출신 사업가 박형만(74)씨와 윤병인(73)씨는 지난 10일 LA 주재 총영사관에서 미국 내 한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16일 LA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해외 진출이 드물던 1960년대에 남들보다 먼저 외국에 나갔기 때문에 봉사할 기회도 먼저 얻게 됐을 뿐"이라며 "좋은 일을 할 수 있어 오히려 감사한다"고 말했다.
◇막장 정신으로 성공… "재산 절반 사회 환원"
박형만씨는 충남 공주에서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대학을 2년 만에 중퇴한 뒤 서울 은평구의 한 공장에 미화원으로 취직한 그는 새로운 기회를 갈망하다 27세이던 1964년 7월 파독 광부가 되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박씨는 "5개월 뒤 독일 함보른 광산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고생한다고 말한 연설을 들었다"며 "그날 많이 울면서 정말 잘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했다. 오전 7시부터 오후 2시까지 힘든 광산 일을 마치고 오후 3시에 다시 인근 축사로 출근해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계약된 3년 기간이 끝났을 때 그는 2만4000마르크를 모았다. 서울에서 아파트 3채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걸 당시 남편을 잃고 고생하던 누나에게 대부분 보냈습니다. 또다시 돈을 벌기 위해 미국 LA로 건너갔습니다. 막장일을 하고 나니 어딜 가도 겁날 게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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